
H 그룹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그날은 유독 긴 하루였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며 애매하게 남은 업무를 정리하고, 퇴근 시간을 알리는 시곗바늘이 6시를 가리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000씨”
등 뒤에서 김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무언가가 내 책상 위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소리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무게였다. 돌아보니 김 대리가 턱으로 책상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거 복사 좀 해 놔요. 내일 아침 회장님 주재 회의 참고 자료니까."
내 눈앞에 놓인 것은 서류라기보다 하나의 '상자'였다. A3 사이즈, 두께는 족히 1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웬만한 전공 서적 두 권을 합쳐놓은 듯한 위용이었다. 이걸 전부? 지금부터?
"아, 그리고 회장님 보실 거니까 반듯하게,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해야 합니다."
김 대리는 그 말을 남기고 가방을 챙겨 휑하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텅 빈 사무실에 나와 그 거대한 종이 뭉치만 남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장님 보고 자료라는 말에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은 덤이었다.
당시 우리 사무실에 있던 복사기는 '첨단 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툭하면 종이를 씹어 드셨고, 조금만 무리하면 과열되어 파업을 선언하기 일쑤였다. A4도 아닌 A3를, 그것도 이 엄청난 분량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복사기는 100장을 넘기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토너 냄새가 진동하는 탕비실 옆 복사기로 자리를 옮겼다.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한 장 한 장 결과물이 나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조금이라도 비뚤어지거나 토너가 번지면 가차 없이 폐기하고 다시 찍어야 했다. '회장님 보실 것'이라는 김 대리의 당부가 주문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밤 9시가 넘어가자 두 번째 복사기도 과열 신호를 보냈다. 결국, 나는 그 무거운 서류 뭉치를 들고 불 꺼진 다른 층 사무실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짜증이 밀려왔다. 명문대 나오고 스펙 쌓아서 입사했더니, 새벽까지 복사기랑 씨름이나 하고 있다니.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오기라도 부려야 했다.
당시는 복사를 하려면 원본을 한 장씩 넘겨야 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종이를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회사의 사활이 걸린 사업 기획안부터 각 부서의 실적 분석까지, 내용은 방대하고 깊었다.
'그래, 이 두꺼운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사람은 회장님도 아니고, 임원들도 아닐 거야. 복사하는 나밖에 없겠지.'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복사기가 돌아가는 틈틈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각 파트가 끝날 때마다 상단 귀퉁이에 작게 적혀 있는 '작성자'의 이름과 내선 번호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신사업 1팀 - 박ㅇㅇ 과장 (내선 1234)\] \[재무기획팀 - 최ㅇㅇ 대리 (내선 5678)\]
그것은 일종의 소심한 반항이자, 이 지루한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지막 장을 복사하고 제본까지 마쳤을 때, 창밖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내 수첩에는 수십 명의 실무자 리스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H그룹은 '새벽형 경영'으로 유명했다. 최고 경영진이 샛별을 보고 출근하니, 주요 임원들 역시 경쟁하듯 이른 시간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했다. 당연히 그들을 보좌하는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도 '얼리버드'가 되어야 했다.
당시 나의 주 업무 중 하나는 전날의 회사 주요 상황과 이슈를 요약해서 상무님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이었다. 각종 데이터를 한 장으로 압축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주었다.
그날따라 매서운 눈빛으로 서류를 검토하던 상무님이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보았다.
"C 프로젝트 현황' 말이야. 여기 문제의 원인이 뭐야? 언제 해결되는 거지?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올린 요약 보고서에는 그저 '현지 문제 발생으로 인한 지연 우려' 정도로만 적혀 있었다. 보고서 중 하나를 요약했을 뿐, 세부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 그게… 자세한 내용은…"
말을 더듬었다. 상무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ooo 씨. 자네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면서 요약해서 올리나? 내가 이 종이 쪼가리 한 장 보려고 새벽부터 나오는 줄 알아?"
호된 질책이 이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하고 임원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데, 문득 며칠 전 새벽까지 복사를 하며 적어두었던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그래, 내가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어. 하지만 누가 아는지는 알고 있잖아?'
그날 이후, 나의 새벽 루틴은 완전히 바뀌었다. 임원 출근 전, 요약 보고서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거나 중요해 보이는 포인트가 있으면 주저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팀 ooo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 작성해 주신 보고서 관련해서 상무님께 보고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고자 전화드렸습니다."
복사하며 적어두었던 그 '실무자 리스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새벽같이 전화하는 신입사원을 귀찮아하던 선배들도, 임원 보고를 위한 것이라고 정중히 설명하면 누구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맥락을 짚어주었다. 나는 그들의 생생한 코멘트를 꼼꼼히 메모했다.
며칠 뒤, 전일 상황 요약 보고 때였다.
"ooo 씨, 이번 실적 하락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보고서에는 단순히 '원가 상승'이라고만 되어 있던데."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아침에 해당 과장님과 통화하며 메모해둔 내용을 떠올렸다.
"네, 상무님. 표면적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이 주원인이지만, 실무 담당자에게 확인해 본 결과 지난 분기에 무리하게 진행했던 프로모션 비용이 이번 분기에 반영된 영향이 더 크다고 합니다. 또한, 경쟁사의 저가 공세로 인해 마진율 방어가 어려웠던 측면도 있습니다."
상무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다시 보았다.
"그래, 일은 그렇게 하는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해."
그날 이후, 나에게는 더 많은 일이 쏟아졌다. 단순히 요약만 하는 게 아니라, 주요 이슈에 대해 실무자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1차적인 판단까지 덧붙여 보고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몸은 두 배로 고단해졌지만, 더 이상 임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10센티미터 두께의 보고서와 씨름하던 그 지독했던 밤과 토너 냄새가 내 비즈니스 인생의 첫 번째 변곡점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았던 그 경험들은 훗날 내가 안정적인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거친 스타트업 야생에 뛰어들었을 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아는 사람'을 찾아내고 문제를 해결하는 질긴 생존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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